‘Beatles’ 검색 건수, ‘Jesus’ 추월하기도
“Christianity will go. …We’re more popular than Jesus now; I don’t know which will go first - rock ‘n’ roll or Christianity.”(기독교는 사라질 것이다. …지금 우리는 예수보다도 더 인기가 있다. 로큰롤이 먼저 사라질지 기독교가 먼저일지 알 수 없다.)1966년 9월 존 레넌은 친분이 있는 영국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은 당시 영국 언론에 소개됐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5개월 뒤 미국의 한 잡지가 이 내용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존 레넌의 사과로 여론은 잠잠해졌지만 아직도 이 발언은 자주 이야기된다. 예수와 음악 밴드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검색어로는 어떨까. 이달까지 구글에서 검색된 단어 ‘Jesus’와 ‘Beatles’ 를보니 대부분의 기간에서 ‘Jesus’가 월등히 많았다. 하지만 지난해 9월에는 4주 이상 ‘Beatles’가 ‘Jesus’보다 많이 검색됐다(그래픽의 점선 참조). 비틀스의 모든 앨범을 디지털로 리마스터한 음반이 이 기간에 출시됐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링고 스타,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 |
김창규 기자
3파운드 1959년 8월 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등이 주축이 된 4인조 밴드 ‘쿼리 멘’은 영국 리버풀의 한 커피클럽에서 공연을 한다. 당시 학생이거나 전기기사였던 이들은 이 클럽에서 공연하기로 돼 있던 다른 밴드가 말다툼으로 공연을 못 하게 되자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때 쿼리 멘이 하루 공연으로 받았던 출연료가 3파운드다. 1인당 하루에 0.75파운드에 불과한 돈을 받고 공연했다.
60년 비틀스는 리버풀을 떠나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음악클럽 ‘인드라’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스트립클럽을 음악클럽으로 간판만 바꿔 단 이곳에서 비틀스는 평일 4시간씩, 주말에는 6시간씩 공연을 한다. 이렇게 공연을 하고 1인당 하루에 손에 쥐는 돈은 2.5파운드였다.
무명인 탓에 적은 돈만 벌던 이들은 62년 데뷔 앨범 ‘Love Me Do’를 내면서 위상이 조금씩 달라진다. 영국의 주요 버라이어티쇼 극장에 출연하는 대가로 받는 하룻밤 출연료가 30파운드로 뛰었다. 영국에서 비틀스가 인기를 끌면서 그들의 출연료도 대폭 올라간다. 64년 미국의 TV 프로그램인 ‘에드 설리번 쇼’에 3회 출연하고 총 1만 달러를 받는다. 당시 이 쇼의 최상급 출연료는 1회에 7500달러였다. 출연료는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당시 2324만 가구(약 7300만 명, 미국 시청자의 60%)가 이 방송을 시청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해 9월 비틀스는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하룻밤 공연하는 대가로 15만 달러를 받는다. 당시 미국에선 최고의 공연료였다. 1분당 4838달러를 벌어들인 셈이다. 비틀스는 하루 3파운드를 받은 지 불과 5년 만에 15만 달러를 받는 수퍼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220억 달러(약 25조원) ‘과거의 비틀스가 현재의 가수를 이긴다.’ 음반 판매량을 두고 하는 말이다. 비틀스는 7년 남짓 활동했지만 세계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1위로 올린 노래가 20여 곡이나 된다. 아직까지 이 기록을 깬 가수는 없다. 64년에는 ‘I Want to Hold Your Hand’ 등 무려 6곡을 1위에 올려놨다.
지금까지 세계에서 팔린 비틀스의 앨범에 대한 공식 집계는 없다. 다만 미국의 음반산업연합회(RIAA)의 공식 집계만 있을 뿐이다. 이 집계에 따르면 9월 현재 비틀스의 음반 판매량은 1억7700만 장으로 1위다. 컨트리 가수 가스 브룩스가 1억2800만 장으로 2위이고 엘비스 프레슬리(1억1150만 장), 레드 제플린(1억 장)이 3, 4위를 달리고 있다. 이것이 미국 내 판매량임을 고려하면 지구촌 음악 팬에게 고르게 사랑받고 있는 비틀스의 세계 앨범 판매량은 13억 장에 달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13억 장에 현재 판매되는 앨범가격 17달러를 곱하면 220억 달러(약 25조원)에 달한다. 이는 쏘나타 110만 대 값에 달하는 규모다. 지난해 포스코의 매출(26조9539억원)과 비슷하다.
비틀스의 앨범은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에만 잘 팔린 게 아니다. 지금도 1년에 많게는 수천만 장씩 팔려나간다. 미국의 음반시장 조사기관인 닐슨 사운드스캔에 따르면 이 회사가 집계를 시작한 1991년 이후 비틀스 앨범이 미국에서 100만 장 이하로 팔린 적이 한 번도 없다. 2000~2009년까지 10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은 2000년 발매된 비틀스의 ‘1’이다. 비틀스의 히트곡을 모은 이 앨범은 무려 1156만 장이나 팔렸다.
마이클 잭슨의 손에 넘어간 비틀스 저작권 지난해 세상을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호화로운 생활과 잇따른 사업 실패로 자금난에 빠졌었다. 하지만 마이클 잭슨이 자금난 속에서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200여 곡이 넘는 비틀스의 노래 저작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5년 마이클 잭슨은 ‘Yesterday’ 등 비틀스의 주요 곡에 대한 저작권을 보유한 ATV를 4700만 달러를 들여 사들인다. 현재 이 저작권의 가치는 마이클 잭슨이 매입한 가격의 10배가 넘는다. 그 후 마이클 잭슨은 ATV를 소니의 지적재산권 사업부문과 합병해 소니/ATV라는 회사를 세우고 이 회사의 지분 50%를 소유한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밥 딜런 노래의 저작권도 보유하고 있는 이 회사의 가치는 20억 달러(약 2조3000억원)에 달한다.
비틀스 멤버가 작사·작곡했는데 노래에 대한 저작권은 왜 마이클 잭슨이 소유한 걸까. 비틀스가 데뷔 초 ‘비즈니스’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63년 비틀스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노던 송즈’라는 회사를 만든다. 그런 다음 비틀스 멤버에게 저작권 관련 계약서를 들이민다. 이때 비틀스 멤버는 ‘엡스타인이 알아서 하겠지’라는 믿음에 내용도 제대로 읽지 않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68년 엡스타인이 사망하자 이들은 ‘노던 송즈’ 측과 재협상을 하려 한다. 하지만 이 회사 대표는 갑자기 ‘노던 송즈’의 지분을 ATV에 팔아넘긴다. 폴 매카트니가 “계약 당시 우린 순진한 스무 살이었다. 창작자를 존중하지 않는 당시의 계약 조건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말할 정도다. 비틀스는 68년 자신들이 직접 애플레코드(Apple Corps)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애플은 비틀스의 저작인접권(비틀스가 실제로 부른 원음 등)과 초상권 등에 대한 권한이 있다. 방송 등에서 비틀스가 실제로 부른 노래를 사용하려면 소니/ATV와 애플에 저작권료를 내야 한다. 현재 살아있는 비틀스 멤버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버는 폴 매카트니의 재산은 8억(1조4000억원)~10억 파운드(1조8000억원)으로 추정된다.
‘애플 vs 애플’ 전쟁 64년 비틀스가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공연하고 떠나자 그들이 머물렀던 호텔의 매니저는 그들이 사용한 이불과 베갯잇(15장의 이불과 베갯잇)을 두 명의 사업가에게 750달러에 팔았다. 이들은 이를 세탁도 하지 않고 3인치 크기의 사각형으로 잘라 보증서와 함께 10달러에 팔았다. 뉴욕에서는 비틀스가 호흡한 공기가 들어 있다며 ‘비틀스 브레스(Beatles’ Breath)’라는 빈 깡통이 팔려나갔고 이들이 사용한 목욕물과 면도용 거품을 사겠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비틀스 가발·부츠·인형·케이크가 나왔을 뿐만 아니라 비틀스 자동차를 만들려는 계획까지 등장했다. 비틀스에 관한 모든 것이 돈이 됐다. 60년대만 이런 것이 아니다. 지금도 비틀스 관련 각종 저작권 수입이 연간 수천억원에 달한다.
특히 비틀스가 운영하는 애플레코드는 기획사로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지만 저작권 등으로 막대한 수입을 올린다. 이 회사는 애플컴퓨터와 상표권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애플레코드는 78년 애플컴퓨터가 상표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했다. 두세 차례의 소송으로 애플컴퓨터로부터 수천만 달러를 받았다. 2007년 애플레코드는 ‘애플’이라는 이름의 소유권을 아예 애플컴퓨터에 넘기고 이를 애플컴퓨터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사용하기로 합의한다. 이에 대한 대가는 5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업계에서 추정하지만 양측은 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고 있다.
국내에도 비틀스 팬 동호회가 50개가량 있다. 동호회 회원의 대부분은 10~30대다. 2만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네이버 비틀즈 매니아’의 경우 10대가 25%, 20대가 30%, 30대가 30% 정도다. 운영자 서강석씨는 “세계적으로 수천만 장이 팔린 비틀스 ‘1’ 앨범 구매자의 40%가량이 10대였다”며 “비틀스는 대중음악이 그때 소비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클래식처럼 시대를 초월해서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고 말했다.
비틀스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앨범 수는 13장(영국 기준)이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겉표지에만 당시 평균 겉표지 제작비의 110배가 넘는 2800파운드를 쏟아 부었다. 겉표지에 흰색만 나와 있는 ‘The White’는 겉표지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흐름에 반기를 들어 나온 비틀스다운 앨범이다.
‘절친’ 에릭 클랩턴에게 첫 아내를 뺏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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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해리슨 (George Harrison·1943~2001) | |
(늦은 밤이에요.)
She’s wondering what clothes to wear.
(그녀는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네요.)
She puts on her makeup and brushes her long blonde hair.
(그녀는 화장을 하고 긴 금발 머리를 빗지요.)
And then she asks me. ‘Do I look all right?’
(그리고 나에게 묻습니다. ‘나 어때요?’)
And I say ‘yes, you look wonderful tonight.’
(그러면 나는 ‘그럼, 당신 오늘 밤 너무 아름다워요’라고 말하지요.)
가수 에릭 클랩턴의 ‘Wonderful Tonight’ 가사의 앞부분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그녀’는 바로 조지 해리슨의 부인이다.
1943년 버스 안내원 아버지와 가게 점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해리슨은 15세의 나이에 비틀스의 최연소 멤버가 된다. 그 후 가수로서 승승장구한다. 비틀스가 해체된 뒤에도 작곡 실력이 빛을 발하며 작곡가로서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그의 첫 결혼은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다. 자신의 아내가 절친한 친구와 결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1966년 ‘A Hard Day’s Night’라는 영화를 찍을 때 19세의 모델 패티 보이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2년 뒤 그들은 런던에서 조용히 결혼식을 올린다.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해리슨은 아내에게 주부의 역할을 원했다. 하지만 아이가 없었던 보이드는 해리슨의 공연이 잦아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69년 클랩턴은 보이드를 처음 보고 반한 뒤 지속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한다.
결국 보이드는 74년 해리슨과 이혼한 뒤 79년 클랩턴과 결혼하게 된다. 이런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해리슨이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마음의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다. 78년 비서 출신 여성과 재혼한 그는 2001년 폐암으로 숨졌다.
보이드는 클랩턴이 이탈리아 모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자 89년 이혼한다. 두 명의 팝스타와 결혼한 그녀의 홈페이지엔 그러나 해리슨과 찍은 사진만 가득하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없어도 옛사랑에 대한 추억은 더욱 진하게 남기 때문일까.
j BEATLES >> 1963 비틀스,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하다
2월 전국구 스타. 두 번째 싱글 ‘Please Please Me’가 달성이 불가능하다던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차트의 1위에 올랐다. 4월 내내 비틀스는 영국을 순회 공연했다. ‘비틀스 소동’도 시작됐다. 레코드 회사 간부들이 비틀스 같은 밴드 발굴을 위해 리버풀로 모여들었다. 팝 음악을 깔보던 언론도 비틀스 뉴스를 전국에 타전했다. 그들은 지역구에서 전국구가 됐다.
11월 4일 왕족들도 매료. 런던의 프린스 오브 웨일스 극장. 비틀스는 보석으로 치장한 왕족을 노래로 압도했다. 타고난 재능과 건방진 재치. 레넌은 마이크 앞에서 말했다. “마지막 곡은 청중이 도와 달라. 싼 좌석에선 박수를 쳐 달라. 나머진 보석 장신구를 짤랑짤랑 흔들어 달라.” 원래 무대 뒤에서 레넌이 했던 말은 이랬다고 한다. 그걸 엡스타인이 간신히 뜯어말렸다. “저 사람들에게 빌어먹을 장신구 좀 흔들라고 말할 거라니까요.”
11월 11일 미국 진출 계약. 에드 설리번 쇼와의 계약. 미국 뉴욕의 델모니코 호텔에서 비틀스의 3회 출연 계약이 성사됐다. 설리번 쇼는 미국 최고의 시청률을 뽐내는 프로그램. 이때만 해도 멤버들은 쇼 출연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올지 정확히 짐작하지 못했다.
1964~65 미국의 혼을 빼놓다
64년 2월 설리번 쇼 출연. 오후 1시30분, 팬아메리칸 항공의 보잉기가 뉴욕의 존 F 케네디 공항에 착륙했다. 3000여 명의 팬이 함성을 쏟아냈다. 분위기는 이미 무르익은 터였다. ‘I Want To Hold Your Hand’가 미국에서 100만 장 넘게 팔렸고, 음반사들이 비틀스 노래를 마구 내놓기 시작했다. 9일 출연한 설리번 쇼는 7300만 명이 시청했다. 세계 기록이었다. 비틀스가 63년 영국을 정복했다면, 64년은 세계를 점령한 해였다. 미국의 성공에 이어 호주·덴마크·홍콩에서도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호주 애들레이드에선 30만 명이 호텔 앞에 모여 비틀스가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길 원했다. 비틀스가 묵고 간 호텔에선 직원들이 그들의 체취가 묻은 베갯잇·수건을 팔았다. 공연장에선 밀려드는 팬들로 압사 사고가 우려됐다. 멤버들의 수송·경호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최고의 한 해였다.
65년 6월 20일 Yesterday. 그해의 첫 투어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으나 입장권이 다 팔리지 않았다. 몇 년 새 드문 일이었다. 물론 인기는 건재했지만 사실 비틀스를 환영하는 공항 인파도 점점 줄었다. 팬들은 채 들리지 않는 25분짜리 공연을 보려고 돈 내는 게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멤버들도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며 방송 출연을 줄였다. 슬슬 변화도 꿈틀댔다. 앞서 6월 14일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폴 매카트니 최고의 작품으로 거론되는 ‘Yesterday’ 녹음이 시작됐다. 팝 음반 최초로 현악 4중주가 도입됐다. 10월엔 레넌의 ‘Norwegian Wood’ 노래에서 조지 해리슨이 인도 악기 시타르를 팝 사상 최초로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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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tles - I Want To Hold Your Hand ↓
The Beatles - She Loves You
The Beatles - Can't Buy Me Love
The Beatles - Love me Do
The Beatles - A Hard Days Night
The Beatles - I Feel Fine
The Beatles - Ticket to Ride
The Beatles - Help
The Beatles - Yesterday ↓
The Beatles - We Can Work It Out
The Beatles - Paperback Writer
The Beatles - Penny Lane
The Beatles - All You Need is Love
The Beatles - Hello Goodbye
The Beatles - hey jude ↓
The Beatles - Get Back
The Beatles - Come Together
The Beatles - let it be ↓
The Beatles - The Long And Winding Road